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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산 산신제

"향토의 전통 민속 문화유산을 보존·계승하고 남양주시의 번영과 시민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산신제
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목 적

향토의 전통 민속 문화유산을 보존·계승하고 남양주시의 번영과 시민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매년
음력 3월3일(삼짓날)에 민속 산신제를 거행하여 시민에 전통 민속 보존의 중요성을 고양하기 위함.

행사 개요

  • 일시 : ( 매년 음력 3월 3일 정오에 시제합니다) 11:00 ∼ 14:00
  • 장소 : 화도읍 천마산 관리사무소위 소운동장
  • 주관 : 남양주문화원
  • 후원 : 남양주시

제례 절차

참신 - 분향.강신 - 초헌 (독축) - 아헌 - 종헌 - 사신 - 소지

祝 文

유세차 00 3월 00삭 3일 경오
남양주시장 000 감소고우
천마지령 천지정기 종우 차산 신기령명
복원 남양주시민 일동 가금불상 질병불침
오곡풍등 육축번성 호표원순 도적불침 호구증식
과갑공명 재해불거 복상일진
금자제성 근이 생주지천 우신 상향!

維歲次 00 3月 00朔 3日 庚午
南楊州市長 000 敢昭告于
天摩之靈 天地精氣 種于 此山 神其靈明
伏願 南楊州市民 一同 呵금不祥 疾病不侵
五穀풍登 育畜繁盛 虎豹遠循 盜賊不侵 戶口增殖
科甲功明 災害不祛 福常日臻
今玆濟誠 謹以 牲酒祗薦 于神 尙饗!

산신제 절차

1. 參神 참신! *모두 재배하십시오!

2. 焚香분향 · 降神 강신!
*제관(초헌관)은 앞으로 나와 분향, 강신하십시오!
초헌관등장 - 분향 후 재배(분향례) - 부복

강신! (좌집사가 잔을 부복한 초헌관에 전하고, 우집사가 잔에 약간 술을 따라주면, 헌관은 땅에 3번 나누어 비운 후, 우집사에게 잔을 전한 후 계속 앉아 있는 <우집사는 잔을 받아 올리고, 이후 좌집사는 정저 1회 한다> 초헌관 일어나 다시 재배한다. (제관은 서서 제자리)

3. 初獻 초헌! - 제관은 부복하여 분향 후 집작, 헌작, 전작한다, 집사는 정저1회 후 계반(밥뚜껑을 연다) 한다 (제관 부복상태임)
· 讀祝 독축! * 참관자 일동 부복(서있는사람: 묵념)하십시오!.(축관은 초헌관 좌측에 등장, 앉아서 축을 읽은 후 헌관 과 함께 일어난 후)재배하십시오!, 참관자 일동, 모두 같이 재배한다. (제관 퇴장)

4. 亞獻 아헌! * 다음은 아헌관 잔 올리십시오!
등장 - 분향 후 집작·헌작·전작 , 집사는 잔을 받아 올린 후 정저1회 한다 , 정저 후, 아헌관 재배하고 퇴장

5. 終獻 종헌! * 다음은 종헌관 잔 올리십시오!
등장 - 분향 후 집작·헌작·전작 , 집사는 잔을 받아 올린 후 정저1회 한다. , 정저 후, 종헌관 재배하고 퇴장

6. 辭神 사신! * 모두 재배하십시오!
(잠시 후) 초헌관은 분축하시고 참관들은 소지해주시기 바랍니다.

7. 焚祝 분축(燒紙소지) 초헌관은 축문을 받아 태운다
집례가 읍·면·동 대표를 부른 후 소지를 읽은 후 해당 읍면동 대표가 나와 부복한 후 태운다.

8. 음 복 례

머리말

우리민족은 지형학적으로 산이많은 환경속에서 살아왔다. 그로 인해 고대부터 자연스럽게 산을 숭배하며 살아 왔다. 그래서 산신은 산을 수호 하는 신령으로 섬겨졌다. 특히 농경사회에서 인간의 힘을 미치지 못하는 홍수나 바람을 관제할수 없어 절대적인 신령의 힘을 빌었다 이렇듯 산신은 풍년농사와 마을의 안녕과 평온을 기원하는 대상이었다. 이에 마을마다 뒤쪽에 있는 큰산을 주산으로 삼아 진산에 산신당을 짓고 산신제를 올렸다.

민속신앙과산신제

산신제는 원시시대 애니미즘 사상에서 출발한 자연 숭배사상의 유형으로 삼국유사 단군신화에서보면 단군왕검이 백악산 아사달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산신이 되었다는 유래가 원형인 듯 하다.

국가에서 제를 지내온 것은 당나라 책에 의하면 신라와 백제에서 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때 국조보감의 기록에 의하면 무당으로 하여금 적덕산, 백악, 송악, 목면산에 제사를 올린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4악 10개 산에 단을 쌓고 중춘, 중추 2회에 걸쳐 국태민안과 삼재 재난(風,水,火)을 막기위해 제사를 지냈다.

한편 민간에서는 각 마을마다 진산에 당을 짓고 춘추,정초에 제사하는 풍속이 있어 마을단위의 당산제, 산제 등의 이름으로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공동부락제를 통하여 주민의 결속과 협동정신을 모아왔다.

조선총독부 간행 "부락제 수"에 의하면 전국부락제 522개 중 신신제류가 176에 이르고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과학문명의 급속한 보급과 함께 많은 부분이 소멸되거나 년1회로 하여 명맥을 유지하는 등 축소되어 가고 있다.
특히 이러한 고유의 민속신앙은 외래종교에 의해 미신으로 몰려 더욱 약해졌고 더욱이 일제시대에 와서 민족신앙이 마을단위의 집단적 단결력을 과시할 위험소지가 다분하다고하여 무차별 탄압이 가해졌 더욱 축소되었다.

이렿듯 어두웠던 역사의 어려움속에서 뜻있는 민속학자들에 의해 전통 민속을 재현시키고 계승 발전시키려는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다. (국립 민속발물관 주도로 계룡산 중악단산신제와 공주시 금강 곰나루용왕제를 지내고 있는 것이 그예라 할 수 있다) 이는 민속신앙이 샤마니즘에서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통민속 행사를 이어오면서 마을 주민의 화목 및 단결을 도모하고 풍년을 기약하고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마을공동 의식의 축제로 승화되는 민족고유의 혼이 담겨 있음을 주지하려는 것이었다.

남양주시에서도 이러한 전통 민속신앙에 관해 마을마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학술적으로 조사 연구하여 체계화가 필요하고 또한 종교적 개념이 아닌 주민 대동의 축제 형태로 개발 육성시켜 주민의 화합을 모으는 행사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에 남양주문화원에서는 천마산 인근 마을의 산신제를 조사하다가 마을단위에서 벗어나 남양주시 전체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고 시민.청소년에게 전통 민속 본존의 중요성을 교육시키고자 천마산 산신제를 개최한다.

호평동·평내동

호만, 지사, 벌말(평촌)마을 등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150여 호가 살았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3.3일과 9.9일 밤 자시에 산치성을 지내는데 마을회의에서 그 달에 중환자, 사망자 등 마을의 부정한 것이 없으면 날을 받아(택일) 마을 사람들 중에 생기복덕을 가려 당주(제주)1인과 달소임(화주 혹은 헌관·축관) 2인을 뽑는다. 이때 당주를 뽑는데는 당주가 될 사람과 그 부인 및 집안 여자의 생리와 임신 여부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부정이 없는 사람을 선택한다. 또한 날을 받게되면 모든 동리 사람들은 모두 생활에 조심을 하며 바깓 출입을 자제하였다.

산치성 드릴 음식은 당주의 집에서 만드는데 3인이 역할을 분담해 산치성 터를 청소하고 장을 봐와서 소머리 및 제물을 준비한다.

조라 술은 쌀밥(고두밥)에 누룩 및 길금(호만마을에서 사용)을 빗어 담구는데 하루,이틀전에 치성 드리는 우물을 청소한 후 새 물을 떠다가 산을 올라가 담궈 둔다.

하루 전날에는 당주 일행이 어두운 밤에 제물을 지고 잘 오를 수 있도록 마을 사람들이 산치성 터에 올라가는 길을 정비를 한다.

제물에 들어가는 비용은 동리의 모아둔 공금과 집집마다 모금을 하여 마련하는데 준비된 금액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예전에는 삼색 과일과 포를 비롯해 육적(살짝 데친것)과 생고기 약간, 떡1말(백설기) 및 소머리를 삶아 올렸다.

또한 천마산은 숫산 이라고 하여 생고기를 올리는데 간과 천엽을 올렸다고 한다.
평내동 궁평마을 에서는 잣봉산(백봉)에 올리는데 이산은 암산 이라하여 고기는 익힌것만 올린다고 한다.

치성 당일 날에는 당주의 집에서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여 당주 및 화주 3인이 밤10시쯤 올라가는데 먼저 우물에서 쌀을 씻어 세옹 3그릇에 담아 산에 올라가 밤11시쯤 주변의 나무를 주어 모아 세옹에 불을 지펴 밥을 짓고 제물을 차려놓은 다음 밥(노고메라함)이 다되면 12시에 제를 지내는데 유교식으로 지낸다.
제례가 끝난 뒤에는 마을 가가호호의 이름을 쓴 소지를 잃고 축원을 드린 후 태운다.

다음날에는 당주 집에서 소머리를 고운 국과 떡을 나눠먹는데 이는 치성 드린 음식은 마을사람들의 정성이 깃든 것이라 나눠먹으면 좋다고 하는데 동리민들의 하나된 마음을 뜻한다고 한다.

이외에도 남양주시에는 농촌과 도시가 혼재한 상태에서 아직도 읍·면·동 각 마을마다에는 이와 같이 산신제나 성황제 터주 고사 등을 지내고 있으나 민속조사연구소등 경기도 편찬지 에도 기록되지 않고 있어, 향후 시지편찬 사업과 맞물려 전통민속 보존차원에서 조사·연구되어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사료된다.